화창한 봄날이었다. 곳곳에 핀 벚꽃 가지가 바람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렸다. 이리 쏟아지고, 저리 쏟아지는 작은 벚꽃 잎들을 제 손이 쥐고자 꼬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퍽이나 행복해 보여, 성규의 얼굴에도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남우현-
아직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제 이름만은 그 음률과 파동으로 기가 막히게 눈치채는 우현이 작고 뚱뚱한 손에 벚꽃을 한가득 쥐고는 고개를 돌렸다. 헤헤-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이 귀여웠다. 가만가만 손짓을 하자 지체 없이 뛰어온 우현이 덥석 성규의 품에 안겼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흥분해도 튀어나오는 귀는 오늘도 예외가 없었다. 유독 혼현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우현은 항상 꼬리와 귀를 달고 살았다. 원래 혼현을 내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 이라지만, 우현의 모든 게 귀여운 성규는 항상 우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성규가 부드럽게 귀를 쓰다듬자, 우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며 끙끙댔다. 하지 말라고 가슴팍에 볼을 애교 있게 부비는 우현의 몸짓에도 아랑곳없이 성규의 손은 우현의 이곳 저곳을 능숙하게 유영했다. 입고 있던 헐렁한 후드티를 젖히고 차가운 손이 맨살에 닿자 흠칫 놀란 우현이 성규의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꼭 하고 쥐었다. 성규의 손에 닿은 유두가 꽂꽂히 섰다. 검지와 엄지로 유두를 꼬집자 우현이 몸을 비틀었다.
크릉... 크릉..
아직까지 말을 할 줄 몰라 나오는 소리라고는 잇새로 뱉어지는 울음소리 밖에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가지곤 몸에 힘이 다 풀려 저에게 매달리며 서있는 우현 때문에 성규의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항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우현을 위해 모처럼 준비한 산책이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꽤나 다급한 발걸음으로 우현을 안아들고 차로 옮긴 성규가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혀를 쯧 하고 찼다.
기다려.
제 이름과 더불어 우현이 알고 있는 몇 안되는 단어였다. 우현의 꼬리가 알아 들었다는 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눈에 물음표를 한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알았다고, 기다리겠다고 꼬리를 흔드는 우현이 너무 예뻐서 한번 웃어준 뒤, 차를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형?]
[어.]
[일단, 공식적인 기록으론 남우현 이름 석자가 존재하지 않아. 주민등록등본 같은 것도 없고, 전국 모든 병원을 다 뒤졌는데 남우현이란 이름이 기록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설마해서 DNA 감식반에 의뢰해 봤는데, 조사 결과 일치되는 사람도 없어. 지문인식 결과도 마찬가지고.]
[...]
[뭐, 여기까지는 나도 이해하거든? 근데 말도 안 되는 게 뭔지 알아? 근 20년간 우리나라 어느 CCTV에서도 우현이의 모습이 찍힌 적이 없다는 거야.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누군가 남우현의 모습을 시간과 공을 들여서 철저하게 지웠거나, 남우현이 20년 동안 어딘가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했거나 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이게 의심스러워서 다시 조사해 보다가, 정말 우연히 남우현이랑 유전자가 99.9% 똑같은 사람을 발견했지.]
[...]
[혹시 보스 20년 전에 선조 귀환 살인사건 기억나? 왜, 그때 늑대랑 결혼했던 여자가 알고 보니 선조귀환 이어서 늑대 중종이 엄청 번식했던 거. 반류 세계에 지각변동이 있을 거라면서 한동안 떠들썩 했었잖아. 그 여자가 기적적으로 최중종을 낳았다는 루머도 돌았었고. 형, 그거 사실이야. 우현이랑 유전자가 99.9% 일치하는 사람이, 1000년에 한번 나온다는 선조귀환, 남연이야.]
하아- 한숨이 세어 나왔다. 생각보다 사안이 훨씬 더 중대했다. 저가 이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그쪽에서도 죽기 살기로 우현을 사수하려고 덤벼될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살인, 납치, 감금 등의 일은 반류 세계에서도 충분히 비도덕적인 일이었다. 아마 이 일이 알려지만, 반류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음은 물론, 그쪽은 반류세계에서 입지가 꽤나 좁아지게 될 것이었다. 성규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절대로 우현을 넘겨줄 수 없었다. 우현이 누구든, 무엇이든 저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저는 우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남우현은, 반류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개과 최중종이란 말이지. 근데 이건 약과야. 진짜 문제는 말이야-]
그것이 자신의 동족에게 칼을 겨누는 일이라도 말이다.
[여기에 형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어.]
***
성규가 본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은 건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유리 화분이 저의 얼굴을 노리고 휙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 저를 맞추는 대신 문으로 돌진한 화분이 파열음을 내며 와장창 깨졌다. 집에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뻔했다. 말없이 앞을 노려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유유히 저를 보는 아버지가 있었다.
여유를 가장한다고 하지만 눈에 불길이 올라오는 게 뻔히 보여 피식 웃은 성규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조각난 화분 한 조각을 집어 반대쪽 벽에 던졌다. 휙- 바람처럼 쏜살같이 날아간 그 유리조각이 반대편 벽에 걸려있던 액자에 부딪혀 액자 유리가 산산이 깨졌다.
액자가 깨지면서 그 안에 있는 엉망이 된 그림은 언젠가 정보통으로 들었던, 저의 아버지가 경매에서 낙찰받고 아주 흡족해 했다던 반 고흐의 알리스캉의 가로수 길이었다. 너.. 너 이 자식- 당장 부들부들 떠는 주먹을 보며 다시 여유롭게 웃은 성규가 다시 허리를 굽혀 깨진 유리조각 하나를 다시 집었다. 유리조각을 허공에 휙휙 던졌다 받았다 하는 성규를 보며 성일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
"누가 네 아버지라는 거야!!"
"아버지는 세상에 미련이 많으시죠. 이 집 곳곳에 숨겨둔 금고만큼, 아끼는 그림만큼, 전시해 둔 도자기만큼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에 미련이 많죠. 저는 솔직히 세상에 대한 미련 같은 거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만히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폭력, 폭언 다 견뎠죠. 별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거든요."
"..."
"전 같았으면 그런 아버지 상대로 이런, 제가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그냥저냥 넘어가 드렸을 텐데, 이제는 못 그래 드리겠네요. 남우현을 만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거든요. 남우현을 잃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
"당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남우현을 뺏어와도 무방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남우현을 지킬 생각이니까요. 해볼 테면 해보시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 저- 말을 하면서도 점점 더 최중종의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성규에 성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정한 패왕(覇王)의 기운이었다. 성일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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