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물에 지쳐있는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특수 신분. 그리고 문과반의 수학과목. 거기다 결정적으로 시커먼 남고에 젊은 남자교생. 사실상 최악의 조건으로, 교생 첫날 담임선생님의 꽁무니를 쫒아 총총 교실로 들어 온 그 사람은 자기를 한 달 간 교생실습을 하게 된 콩(홍)진호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엉성한 발음만큼이나 별 거 없는 한 달이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규콩] I like to play the game
w. 궅
내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교생선생님이 오고 며칠 뒤, 3교시 쉬는 시간 옆 자리 녀석들이 시시덕거리며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된 후 부터였다.
"야, 콩쌤 좀 귀엽지 않냐"
"어 귀엽기보다는 좀 웃긴 듯? 선생님이랑 안 어울리는데."
"벌써부터 그 발음으로 수학 하는 거 쫌 걱정되긴 한다."
그냥 듣기에는 별 얘기가 아니지만, 한 시간에 한번 씩 여자 얘기와 게임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남자 고딩들이 그런 얘기에 금 같은 쉬는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분명 '별 일'이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혀를 쯧 짰다. 이제 막 수업 참관만 하고 있는 교생일 뿐인데 굳이 거기에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한 놈들이 우리 반에 있을 줄이야. 수능 치고 얼굴 볼 일 없는 애들임에는 분명하지.
나는 몇 번 의미 없이 펜을 굴리다가 교과서 한 귀퉁이에 글씨를 적었다. 콩. 사실 그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것은 아마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
교생선생님이 온 그날, 교무실의 분위기는 어딘가 달라보였다. 기분 탓이 아니라, 고등학교 생활동안 두어 명의 교생선생님들이 왔다 갔지만 그날처럼 선생님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이는 광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담임선생님 자리 옆에 앉아서 뭔가 굉장히 경청하는 교생선생님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흘끗거리는 다른 선생님들의 시선도.
"이거 오늘 명단이요."
"오냐. 선도부 왕고 오늘도 고생했다."
"에이 뭐."
명단 제출 때문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깨고 선생님을 불렀다. 1학년 교육이 끝날 때 까지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3학년이란 이유로 내가 선도부 통솔을 도맡아야 했는데, 매일 반복하던 일이 그날따라 유독 껄끄럽게 느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참, 아까 봤겠지만 여기 홍진호 선생님. 잘 챙겨줘야 된다? 선생님 후배야."
거기서부터 이상했다. 내가 고등학교 2년 넘게 선도부로 묵었기로서니 교생선생님을 챙기기까지 해야 하나? 거기다 선생님의 알 수 없는 이 다정함은 뭐지? 학생 보는 앞에서 어깨를 주물거리고 싶을 정도로 각별한 후배였나?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더니 홍진호라는 교생이 앳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면서. 이건 또 뭐야? 끼 부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로 여자 같은 외모도 아니고 행동거지나 목소리도 전혀 그런 것과는 멀어 보이는데 그건 정말 뜬금없는 감상이었다. 나는 예의바르게 두 걸음 쯤 물러난 뒤 뒤돌아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는 동안 등 뒤로 나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을 들었다.
"아 쟤가 선도부예요?"
"저래 봬도 꾸준히 선도부만 한 놈이야."
"와. 완전 안 그렇게 생겼는데. 쟤 그럼 착해요?"
"응. 머리도 좋고 싹싹해."
"친해지면 좋겠다."
나는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그 말들에 낯이 뜨거워 져 황급히 교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
교생선생님이 온 지 일주일 쯤 되자, 조·종례 시간 외에 수학 시간에도 칠판 앞에 선 교생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수학 선생님이 수업하는 옆에 대기하고 있다가 유인물을 나눠주거나 칠판을 지우는 일을 했는데, 수업 듣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무슨 생각 하느냐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걸 보고 반 애들은 전부 킬킬거렸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냥 실수해서 관자놀이에 땀이 맺히는 모습을 보면서 힘들겠네,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했다.
교생선생님이 직접 진행하는 수업이 시작되자, 아니나 다를까 새로 온 선생님들이라면 꼭 듣게 된다는 통과 의례, 첫사랑 얘기가 나왔다.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쌤 첫사랑은 언제 했어요?"
"몽정은요?"
"섹스는요?"
전투적으로 웃어 제끼는 학생들에게 지기 싫은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데에 수줍어하는 타입은 아닌지 교생 선생님은 화끈하게 대답했다.
"첫사랑은 중1 때. 그때 이상한 꿈도 꿨지. 섹스는...스무 살이었나."
숨길 게 뭐 있냐는 태도였다. 오히려 그런 박력은 19세 남고딩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환호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귀 기울이지 않는 척 하며 머리를 굴렸다. 선생님은 남자치고 덩치가 좀 작은 편인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작고 아담한 사람과 잤을까? 얼핏 보기엔 누군가를 안는 것만큼이나 안기는 것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섹스에서 시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팬티바람의 홍진호를 떠올릴 때 쯤, 누군가가 물었다.
"쌤 그럼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 기억으론 교생 첫날부터 그의 왼손 약지에는 금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걸 보고 어련히 솔로는 아니겠구나 싶었었는데.
"너네 나랑 스무고개 해?"
"어~ 빼지 말고요~"
"지금 다 얘기하면 재미없잖아. 그럼 선생님이랑 게임할래?"
게임이라.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에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술렁였다.
"나 학교에 있는 동안까지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맞힌 사람이 이기는 거야."
"에이 그게 뭐예요."
"그것만 맞히는 건 찍을 수도 있으니까 조건을 더 걸게. 내 취미가 뭔지, 이긴 사람한테 무슨 선물을 줄지도 맞춰야 돼. 어렵지?"
"너무 어려운데요~"
불평과 추측이 난무하는 교실에서 나 혼자만 심각했다. 분명 봤다고 생각했던 금반지가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뺐나? 내 착각이었나? 아니, 분명 교무실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왼손에 금붙이를 본 기억이 있었다. 잘못 봤나? 이상하네. 이 순간 웃고 있는 건 교생뿐이었다. 이기고 들어갈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제로(0)를 넘어 미궁부터 시작하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
교생의 게임은 우리 반에만 해당했는지, 다른 반 애들은 이 소식을 듣자 무척 신기해했다. 그렇게 인기가 많으냐, 어떻게 벌써 그만큼 친해졌느냐 따져 묻기도 했다. 사실 친해졌다기 보다는 교생의 입장에서 '빨리 친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이 게임을 시작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날부로 우리는 틈만 나면 복도를 서성이며 교생쌤을 찾았고, 점심시간에는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수작을 부리는 놈들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솔직히 찍기의 신이 들리지 않는 이상 그 답을 맞힐 확률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귀는 사람이야 양자택일 한다 쳐도, 취미나 선물은 무슨 수로 맞힐 것이며, 맞다 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증명할 길이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로, 교생은 아주 야비한 게임을 걸어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현 듯 깨달았다. 정답이 없는 게임이라면 좋을 대로 정답을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홍진호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떤 답을 가지고 와서 자기를 즐겁게 해 줄지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음에 들면 정답, 아니면 땡. 그렇게 우리를 갖고 놀 심산이었을까. 나는 더 이상 홍진호의 조그만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그가 무조건 내 대답이 정답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우회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수시전형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할 내 신분을 알차게 이용하여 시시때때로 교무실을 드나들었다. 그럴 때마다 홍진호가 교무실에 붙어 있는 확률은 거의 반반이었는데, 교무실에 없는 경우에는 대부분 화장실이나 흡연구역에 가 있곤 했다. 생각보다 동선과 패턴은 단순해서 나는 곧 교무실을 들르지 않아도 홍진호와 얼굴을 마주칠 수 있는 루트를 몇 가지 찾아낼 수 있었다.
“어? 성규 자주 보네?”
“인연인가 보죠 뭐.”
“너 좀 애어른 소리 듣지?”
“성숙하단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내가 말 마다 받아치면 홍진호는 항상 발랄하게 웃었다. 아직 대학생이긴 한 모양인지 약간 스무 살 느낌도 나고, 막 전역한 군바리 느낌도 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학교 옆에 있는 여고 애들 같은 느낌도 났다. 그게 홍진호의 가장 이상한 점이었다.
**
2주. 홍진호가 눈앞을 떠날 때까지 약 2주가 남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지난 중간고사에서 수학을 망친 까닭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 홍진호와 함께 보충학습을 할 것을 권유했다. 야자 며칠 정도만 내 공부를 봐 달라며 홍진호에게 뭐라 속닥거렸다. 잠시간 둘이서 무슨 말을 그렇게 귓속말로 길게 나누는지 눈꼴이 시렸지만 뜻밖의 기회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하면 포기했던 진짜 정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며, 아니더라도 홍진호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는 동안 담임선생님이 홍진호의 어깨를 톡톡 치며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부탁해. 술 살게.”
“형…선생님은 맨날 술만 사면 다죠?”
정말로 막역한 사이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결혼도 했고 애도 있으며 전형적인 아저씨의 표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둘이 있으면 꼭 자기들끼리 캠퍼스로 돌아가기라도 한 양 시시덕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모습은 선도부라는 얄팍한 감투를 쓰고 있는 나나 반장 정도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쨌든 그 날부터 사흘 정도 홍진호와의 보충학습을 하기 위해 야자시간에는 반에서 나 혼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교무실 근처에 있는 남교사 휴게실이 그 곳이었는데, 퀴퀴할 줄 알았던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텅 비어 있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데다 거기서 쉴 만한 여유가 있는 선생님들도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홍진호는 그래서 가끔 전화를 하거나 심심할 때 이 곳에 혼자 앉아 있는다고 했다. 화장실에도 흡연구역에도 없어서 오리무중이었던 홍진호의 마지막 거취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컴퓨터 없는 컴퓨터용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진호는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나는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전화는 누구랑 하는데요? 애인?"
"엉? 하하 너 젤루 관심 없는 척 하더니 제일 능구렁이처럼 물어보네."
"대답은 안 해줘요?"
"거기에 대답해주면 반칙이지."
쓸데없이 고집이 센 홍진호 때문에 나는 갑자기 조바심이 들었다. 적당히 얼굴 좀 트고 몇 마디 구워삶으면 어린애 귀여워서라도 오냐 해 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자기가 제일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너 같은 애 몇 명 있었는데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 줬어. 그 말에 또 한 번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정도 공을 들인 나도 이제야 직구 한 번 날렸는데 도대체 어떤 엄한 놈이 그 사이 쓸데없는 질문으로 이 사람의 가드를 올려놨는지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반장인가? 그 놈은 보기엔 고지식해 보여도 사실 온통 의뭉스러움 뿐인 놈이었다. 유력하다. 하지만 그 녀석은 수학을 잘 하니까 이런 기회는 얻을 수 없다. 절대적으로 내가 유리했다.
약간 유치한 짓거리를 하는 것 같아서 순간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는데, 다행히 홍진호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수학 문제 풀이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홍진호를 쳐다봤다.
“힌트라도 줘요.”
“힌트?”
“뭐 좋아하는지, 취미 힌트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예요?”
“음...힌트. 생각 안 해 봤는데.”
역시. 그럼 그렇지. 이 사람은 애초에 답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한 거다. 나는 어금니를 한번 꽉 깨물고 샤프를 딸깍거렸다. 그러자 홍진호가 계속 진동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그래’ 했다.
“힌트 줄게. 지금 하고 있는 거랑 관련 있어.”
“완전 모르겠는데요.”
“난 힌트 준거다? 다른 애들한텐 얘기 하지 마. 귀찮아지니까.”
“아깐 반칙이라 시더니?”
“됐고 다음문제 빨리 풀어. 너 오답률 장난 아냐 지금. 이게 고3이여 중3이여?”
마지막 말은 좀 울컥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환희에 차서 약간 붕 뜬 상태로 기출 한 세트를 단숨에 풀었다. 내가 생각해도 애 다루는 거 쉽다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창문 밖이 완전히 깜깜해질 때 쯤 우리의 첫 보충학습이 끝났다. 반으로 돌아가니 홍진호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몇몇이 물어왔다. 그 중 반장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무표정을 일관한 채 공부만 했다고 답했다.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감상도 덧붙였다.
**
마지막 보충수업 때 홍진호는 나에게 ‘언제 정답을 말할 거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이 사람에게 정답이랍시고 허튼 소리를 해댄 게 몇 명이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가 성에 차지 않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애초에 홍진호의 마음대로 놀아나 줄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날 이후 힌트를 더 준 것도 아니면서 뭘 더 바라나 싶기도 했다. 그 대신 나는 홍진호와 최대한 사적인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애인의 유무를 추리해나갔다. 반지 얘기는 찰떡같이 잡아떼는가 하면 연말에 한 일이나 마지막 키스를 물었을 땐 눈을 막 내리깔면서 대답을 웅얼거렸다. 하여튼 알기 쉽게 생겨먹어서는 정작 알고 싶은 건 꽁꽁 숨기는 타입이라 나 같은 성격은 답답해서 죽을 맛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별 소득이 있었다 하면 있고 없었다 하면 없는 보충학습이 끝났고, 내 수학성적이 단기간에 오르길 기대하는 건 사치라는 사실 정도는 담임선생님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다만 선생님이 홍진호에게 ‘좀 친해졌어?’하고 물었고, 홍진호가 ‘조금.’하고 대답한 사실에 나는 이유 모를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렴풋하던 게임의 정답을 알 것 같았다.
**
홍진호는 한동안 연구수업 준비 때문에 교무실 구석 노트북에 코를 박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교생실습이라는 게 적당히 애들한테 살갑게 굴며 수업 좀 하다가 꿀 빠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홍진호를 눈여겨 보다보니 교생이라는 가련한 입장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1층 자판기 까지 가서 매실주스를 뽑아 다시 교무실의 홍진호에게 가서 건넸다.
“쌤 파이팅.”
“오냐. 수업 때 너 문제풀이 시킬 거야.”
“호의를 원수로 갚는 건 까치도 하지 못할 발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너가 젤 친해서 그래.”
친하면 문제라도 미리 알려주시지. 홍진호는 캔을 받아들고 그대로 다시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수학 수업에도 PPT 자료가 이렇게 필요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효용성은 심히 의심해 볼 만 하지만, 동그라미와 네모를 열심히 드래그 하는 홍진호의 모습이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서 그건 좀 만족스러웠다.
연구수업은 홍진호라는 교생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장식할 이름이었다. 반 애들은 답지 않게 ‘콩쌤’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 울릴 수 있을지를 모의하고 있었다. 그들 중 홍진호와의 게임에 대한 걸 잊은 사람이 반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나머지의 반은 이미 시도했다가 꽝을 뽑았을 테고, 그 나머지의 반은 포기, 그리고 남은 사람은 나를 비롯해 두어 명 정도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일종의 타이밍 싸움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정답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교생 홍진호의 연구수업은 너무 지루하지도, 너무 산만하지도 않게 끝이 났다. 그것은 반 아이들과 적당히 친해진 까닭도 있을 것이고, 문제풀이를 하러 나온 내가 막힘없이 풀이를 써 내서 흐름을 살린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이건 좀 오바긴 하지만. 홍진호는 반 애들이 준비한 깜짝 선물에 눈시울을 붉혔다. 꽃 몇 송이와 과자 뭉텅이를 챙겨 나가는 홍진호의 뒷모습을 곱씹으며 나는 어딘지 들뜬 상태로 오전 수업이 끝마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홍진호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날따라 홍진호를 찾기가 어려웠다. 흡연구역을 서성이다가 학주 선생님에게 맞을 뻔 하기도 하고, 계단을 빠르게 오르내리느라 허벅지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홍진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연구수업 끝나는 대로 영영 퇴근한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나 교무실에도 가 봤지만 그가 가지고 다니던 네모난 가방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쌤. 찾았잖아요.”
“왜? 수업에 문제 있었어?”
“아니. 할 말 있어서요.”
“너 정답 맞힐 거면 빨리 맞혀. 나 이제 곧 가.”
나 이제 곧 가. 그 말이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나는 다른 애들이 어떤 정답을 말 했는지, 이미 답을 맞힌 사람이 있었는지, 애초에 게임의 답이 정해져 있긴 했는지 등의 쌓아 왔던 질문들을 뒤로 한 채 다소 명령 같은 어조로 얘기했다.
“저 야자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엉?”
“아니면 나 야자 쨀 거니까.”
“야 안돼애.”
타이밍 좋게 수업종이 울렸고, 나는 홍진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몇 발 뒤로 걸었다. 남교사 휴게실의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홍진호의 멍한 표정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야자. 그 놈의 야자를 끝내고 이 지독했던 홍진호의 게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
나는 모든 불이 꺼진 교무실과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홍진호는 야자를 쨀 거라는 인문계 고3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을 개무시한 것이다. 고개를 떨군 채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학교에서 주로 핸드폰 없이 지낸 까닭에 번호를 물어보는 것도 계속 미뤄왔는데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잘하면 담임선생님에게 물어봐서 번호를 알 수도 있는 거지만, 남을 통해 번호를 따봤자 스토커 같기만 할 것 같았다. 울적한 마음이 끝을 모르고 퍼지고 있었다. 그때, 빠른 구둣발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성규야.”
내 어깨를 잡고 돌린 사람은 술에 절은 콩, 아니 홍진호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주냄새 같은 게 풀풀 났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가늠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회식 하자 그래가주구. 따라갔다가 겨우 나왔어.”
“쌤 괜찮아요?”
“괜찮아. 형 술 잘 마셔.”
“네?”
갑작스런 형 소리에 나는 하려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홍진호는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형이 미안해’ 따위의 제정신이 아닌 말들을 흘려댔다. 나는 홍진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복도 끝 계단에 가 앉았다. 술 냄새 때문에 나 까지 취할 지경이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대체적으로 술톤인 것을 감안했을 때, 홍진호가 마셨을 술의 양 또한 어림짐작이 가능했다. 필름은 안 끊기려나. 지금 정답이랍시고 게임 운운하는 건 애 같으려나. 나는 홍진호의 뜨끈해진 뺨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숙취해소음료라도 사 올까요?”
“아냐 교복 입은 애한테는 그런 거 안 팔걸?”
“그러는 그 쪽은 교복 입은 애 앞에서 술 냄새 풍기고 있으시구요.”
“으응. 너가 할 말 있댔잖어.”
그런 말은 또 멀쩡하게 잘 하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내일 일어나서 기억 안 난다고 무효 선언 안 할 거란 보장 있나? 나는 가만히 그러고 있다가 홍진호의 목덜미 근처에 코를 가져다 댔다.
“쌤 술을 입으로 마신 거예요, 몸에 들이 부은 거예요. 누가 제일 많이 먹였어요?”
“간지럽게 하지 마. 너 무서워.”
자꾸 손끝부터 팔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기분 때문에 나는 계속 다리를 이리 꼬았다 저리 꼬았다 했다. 홍진호가 내 무릎을 찰싹찰싹 치며 게임 안 끝낼 거냐고 재촉했다. 그때 나는 조금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정답 말해 빨리, 정답.”
“진짜 맞힌다?”
“해 봐.”
“진짜로.”
“그래. 사귀는 사람은?”
“없음.”
“취미는?”
“...남자 후리기.”
“...선물은?”
“.....”
“.....”
“나랑 오늘 잘 거죠?”
***
나는 그 후 거나하게 열병을 앓았었다. 그 날 이후 홍진호가 종적을 감추자 내 기말고사 성적도 뚝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나는 ‘자퇴할까, 그게 답인 것 같애.’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진지하게 재수를 고민하기도 했다. 영 공부가 손에 안 잡힌 까닭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다시 제 정신을 찾았고, 나는 부단히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가증스런 홍진호가 다시 흔적을 남긴 건 수능 전 날이었다. ‘엿 머겅’ 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카톡 기프티콘을 보내왔는데, 나는 그걸 받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면 내 인생이 영영 답이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끝난 저녁 다시 홍진호에게 연락을 하니,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홍진호는 사람 환장하게 하는 재주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악질적인 행동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홍진호에 대한 기억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 사이 나는 군대와 두 번의 연애, 그리고 휴학을 거쳐 완벽한 취준생으로 거듭났다. 이런 상황이 되니 나도 모르게 그 시절 교생 홍진호가 떠오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정상이 아닌 게임이었는데, 우리 반 애들도, 나도 뭐가 그리 승부욕에 불탔는지 모를 일이다. 뭐,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내린 답이 정답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홍진호는 끝까지 가타부타 얘기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지내려나. 홍진호. 콩. 술에 절은 술콩이 되었던 홍진호를 떠올리니 담배가 말려서 편의점에 들어갔다. 못 보던 알바생이 나에게 인사했다. 멘솔을 주문하고 뒷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는데 민증이 없으면 판매를 못한다며 알바생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요? 하긴, 그런 소리 종종 듣긴 하는데요. 쩝, 입맛을 다시고 카드를 다시 넣으려는 찰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 담배 주세요. 제가 살게요. 제자거든요.”
“...홍...”
“너 임마 담배 끊어. 형두 끊었어.”
“홍진호.”
홍진호가 계산 된 담배를 건네며 슬쩍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눈 꼬리에 주름이 잡혔는데 그게 그렇게 요사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역시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이 동네 살어?”
“네...쌤은요?”
“나? 몰라. 맞춰 봐.”
“와. 진짜.”
아. 나는 한 번 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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